책 - 내가 죽어야 하는 밤 어떤 흔적

어릴적 TV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환상특급이라는 단편영화 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는 동양물이라 제대로 볼 엄두도 못내지만, 서양귀신은 흥미롭게 볼 수 있으니까:) 미스테리/공포/스릴러의 원조격인 '환상특급'은 그당시 10대 초반이던 내가 하루도 빼먹지않고 챙겨볼만큼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가 문득 그때의 시리즈 중에서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어떤 평범한 부부가 있다. 그들은 돈문제로 모든 의욕을 잃은 상태였고, 어느날 검정 양복에 검정 모자를 눌러쓴 신사가 찾아와 작은 상자를 건네며 은밀한 제안을 한다. 이안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사람은 죽고 대신 당신은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남편은 화를 내며 버튼을 갖다 버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다버렸던 버튼상자는 집안으로 들어와있었고, 자신이 누군가를 죽인다는 사실보다 당장 돈의 유혹에 흔들린 아내는 계속해서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버튼을 누르고만다. 그러자 검정양복의 신사가 다시 찾아와 약속했던대로 그들에게 큰 돈가방을 건네고, 환호하는 부부로부터 버튼상자를 챙겨 되돌아가는데, 그의 행동이 의아해져서 "버튼은 왜 수거하는거죠?"라고 부부가 묻자,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는 답변이 돌아왔고.. 화면속의 아내처럼 TV를 보던 나도 공포에 질려갔었지. 굉장히 오래전에 본 영상이라 디테일한 부분은 다를 수 있겠지만, 아직도 기억날만큼 충격적인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아 쓰다보니 다시 보고 싶어지네;


암튼, 그 버튼은 일종의 로또였고 동시에 살인버튼이었다.
작가는 분명 영화 '더 퍼지'를 보고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썼다고 했지만, 국가가 일년에 단 하루를 사냥의 날로 잡아서 전국민이 누군가를 사냥해대던 영화 '더 퍼지'보다는 '환상특급'의 '버튼버튼'이 더 많이 생각난 이유는 둘다 살인복권이라는 소재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누구나 10유로를 내면 살인명단에 이름을 적을 수 있는데, 넘쳐나는 범죄와 부족한 예산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정부가 일년에 하루만 날짜를 정해서 살인명단에 올라온 사람을 죽여도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겠다 약속했다며, 찌라시같은 웹사이트에서 살인복권을 발행하고 8월8일이 되자 개개인의 사람은 군중이 되고 그들은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단순히 상금만 걸렸다면 어리석고 우매한 몇명만이 거리로 나섰겠지만, 양아치들이 자극적인 영상으로 돈을 벌고자 사냥감에게 '딸을 성추행하려다가 사고로 딸을 하반신 불구로 만든 쓰레기'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그러자 이제는 어리석고 우매하지 않은 군중들도 분노하며 서서히 악의가 전염되는데.. 개인이 군중이 되고, 군중속에 스며들어 생명의 존엄성보다 폭력의 정당성을 분노에서 찾고, 자신은 얼굴에 종이봉투를 뒤집어쓴채 거리낌없이 벤과 헤르추를 뒤쫓는 군중의 묘사는 너무나 공포스럽고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만 서술하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행동하는 개인 보디가드 '마르틴 슈바르츠'나, 쫓기는 주인공들을 잠시 숨겨주던 성직자, 벤과 애증으로 얽혀있는 아버지 같은 '사람'을 촘촘히 끼워넣어서 이야기를 균형있게 풀어나간다.

그리고 주인공인 벤에게 딱히 애정을 주지않고 딱 몇발자국 물러서 따라가게 되는데, 읽다보면 원인이 뚜렷해진다. 평생을 불성실하게 마음대로 살아온 그는 알콜중독을 진단받은 적이 있고, 딸을 불구로 만드는 사고를 냈었고, 딸이 사고난 이후로 술을 끊었지만 특별한 날은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왔다며 그게 하필 사냥대회 전날밤이었기에 오늘은 일자리도 짤렸다는 식의 태도는 영락없이 주정뱅이 같아서-_- 이혼했지만 아내와는 친구처럼 지낸다고 철썩같이 믿으며 아직도 여보라고 부르는게 한심해서-_- 과연 그의 믿음대로 전아내인 제니는 벤과 베프처럼 지냈을까 싶어지는 묘사들이 몇가지 있었는데, 그들의 딸인 율레가 옥상에서 떨어진게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거라 주장하던 벤을 제니는 꾸준히 반대하고 무시해온거랑(결정적인 사진을 본 후에야 비로소 의심을 시작함) 율레가 독극물을 주사맞은 듯 하다니까 제니는 곧바로 벤부터 원망하고 탓하거든. 게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제니는 어느새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지. 그래서 전아내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벤 관점의 묘사가 오히려 '그건 니 착각인듯'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




단돈 만원만 내면, 
굳이 내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전국민이 내 원수를 죽이려 달려든다면, 
나는 거기에 누구의 이름을 적게 될까.

없었다. 
한참을 고민해봤는데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 순간 전율 비슷한 게 느껴졌다. 옛날의 나는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사람이 늘 있었는데말야! 지금의 나는 그 누구도 살인명단에 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미워해도, 그렇다고 나때문에 그사람이 비참하게 죽는 것은 옳지않다라는 생각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죽이고싶을만큼 증오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 나 정말 삶이 평화로워졌구나..!





원래는 동생이 먼저 대여해온 책이라 녀석이 먼저 읽었는데,
내가 저녁에 머리 말리고 책상에 앉아 열심히 읽고 있으니까 "그거 재미없어"라고 했다.
왜냐고 물어보니까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재미없다고...

근데 스릴러를 좋아하는 내게는, 너무너무 재밌었던 소설이다!
챕터마다 잠깐씩 책을 덮고 정신을 고르긴 했지만 거의 단숨에 다 읽어버릴만큼 재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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