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9 뜻밖의 하루 어떤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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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가 회사 앞으로 놀러오면 목살 스테이크를 사주겠다는 말에, 주말내내 '스테이크~ 스테이크~'하고 룰루랄라 잠들곤했다. 그러다가 "언니, 퇴근후는 도저히 안될 것 같고ㅠㅠ 점심시간에 올 수 있어?"라고 해서, 아 스테이크는 물건너간 것인가, 그냥 간단히 밥먹고 얘기나 해야겠다, 근데 왜 눙무리 나는거지;ㅁ; 하며 포기했거든.

 

 

 

 

1.

근데 막상, 그녀가 내손을 잡고 이끈 곳은 스테이크집이었다!!

하나하나 먹기좋게 잘라서 내 접시에 덜어주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스테이크라니, 쫄깃한 닭다리라니. 태풍이 지나가느라 우중충한 하늘에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서 컨디션조차 왔다갔다했지만, 맛있는 것을 먹느라 다 잊었다. 스테이크 한조각 입에 넣을때마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고개가 왼쪽으로 30도 기울어져서, 그런 내모습이 보일때마다 친구는 괜히 뿌듯하다고 했다.

나는 맛있는 걸 먹여주면 너에게 뿌듯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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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디저트까지 살살녹는 티라미수로 해치우며 잠깐의 수다를 떨고 있노라니, 중국 출장에서 내게 주려고 사온 게 있는데, 사무실에 두고나왔다길래 그녀의 회사로 향했다. 근데 회사건물 1층에서 이름모를 어느 화가의 그림전이 무료라네? 영이를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동안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독특한 그림들을 구경하고나니까 갑자기 결심이 섰다. "여기 골목을 꺾으면 예술의 전당이야~"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괜히 오늘 돌아다니다가 또 몸살나면 안되잖아'라고 생각했었지만, 울긋불긋한 화염이 가득했던 그림들을 봤더니 이대로 집에 가기는 싫고 뭔가를 더 봐야겠다는 문화생활 허영심이 솟구쳤달까? 선물받은 장미차를 가방안에 챙겨넣고,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예술의 전당으로 고고싱~

 

 

 

 

3.

때마침 볼만한 전시회는 두가지나 있었다. '마크 로스크전'이랑 '허영만전'

그리고 또 때마침 나는 장애인카드를 챙겨들고 나와서, 각각의 전시회를 6천원으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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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맘으로 예술의 전당에 입성해서 동생에게 '나 어디게?'라고 물었더니, 나온 답들..

여의도? 파주? 명동? 강남?   이게 내 행동반경인가 싶기도 해서 웃겼고,

아무말 없이 설마 남쪽으로 여행갔을까봐 '혹시,,,경주?'라고 되물어와서 빵터졌다.

 

 

 

 

4.

먼저, 마크 로스코전..

누군가는 그의 그림앞에서 목놓아 울었다던데, 나는 똑같은 그림앞에 앉아 5분정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조금 울적해졌을 뿐이었다. 그림들이 나로서는 너무 난해하기도 했지만, 아마도 지금의 내 정신상태가 너무 평온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느 벽구석에 '전쟁과 무관하게 생각없이 유쾌하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극한 슬픔을 끌어내고 싶었다'라는 설명을 읽으며 도대체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이해했는데, 밝은 주황색을 유심히 살펴봐야만 그밑에 어두운 다른 색깔을 찾아낼 수 있던 것 말고는 딱히 슬프지는 않았거든. 아마 퇴사전에 와서 봤다면 괜히 우울해지고 멜랑꼴리해졌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는 그냥 '아.. 좀 울적해질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끝..

 

 

 

 

5.

정신이 송두리째 흔들리지는 않는 전시장을 거의 한시간이나 돌아다닌 원동력은, 신분증을 맡기고 3천원에 대여해온 오디오 가이드 덕분이었다. 무려 유지태의 보이스!! 중저음의 나른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꾸 뭐라고 얘기하잖아~* 나도 모르게 들은 설명을 듣고듣고, 또 듣고.. >_<ㅋ

 

 

 

 

6.

이미 한시간이나 돌아다녔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가만, 허영만전 포스터에 보이는 저 캐릭터는 누규? 설마 손오공?? 하며 나도 모르게 티케팅하고 입장완료. 그리고, 정말 잘 들어왔다고 혼자 박수치며 좋아했다.

어릴적에 그토록 외치던 '치키치키 차카차카 초코초코촉!'의 원작자가 허영만이었다니! 나는 이것을 왜 이제서야 안 것인가! 연습장에 휘갈기듯이 그려댄 '날아라 슈퍼보드'의 캐릭터들을 보았을 때는, 어릴적 소꿉친구를 만난것마냥 너무 반갑고 좋아서 자꾸 끙,하며 앓는 소리까지 냈다. 허공에 나방들을 모빌처럼 매달고, 나방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사오정 캐릭터를 보며 너무 좋아서 어깨를 움츠리는데, 그런 내모습을 힐끗 보던 안내원이 말풍선을 쥐어주며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졸지에 사오정이랑 찍은 기념사진이 생겼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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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나게 둘러보고나서 밖으로 나오니, 스벅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홀짝여야겠다던 계획은 접어야겠더라. 태풍의 영향으로 대낮이 어둑어둑해지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였거든. 홀가분하게 외출하느라 우산따위 집에 모셔두고 나왔으니, 비에 홀딱 젖기전에 집에 들어가야지.. (그리고 사실, 체력도 방전되어서 마이너스...)

 

집으로 돌아와서는, 홈웨어로 갈아입자마자 뜨거운 물에 장미차를 내려서 분위기있게 엄마랑 티타임도 가졌다. 중국에서 건너온 장미차는, 친구의 조언대로 첫잔은 버리고 두번째잔으로 마셨는데... 왜...왜... 장미차에서 장미꽃 특유의 향기대신.. 누룽지같은 구수함이 느껴지는 건지...ㅋㅋㅋㅋㅋㅋ

 

 

 

 

8.

포기했던 스테이크를 먹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들고, 계획에 없던 전시회를 두개나 둘러보고,

뜻밖의 하루는 그렇게 꿈처럼 흘러가서, 일주일도 안지난 그 날이 벌써 오래전 앨범에 꽂힌, 반짝거리던 추억처럼 아련해지는 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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