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나날들 - 2. 이번주 하루, 그리고 또 하루

- 두번째 월욜
윤과장이 인사를 씹었다. 서로 다신 안볼것처럼 트러블 겪어놓고도 시침 뚝 떼고 태연한척 인사를 건넨 나도 참 또라이 같겠지만, 맞은편에 앉아서 눈을 마주치고도 인사를 씹는 그역시 너무 한심하더라. 같잖아서 피식거리며 일이나 하자는 생각에 업무망에 접속했는데 어라, 이건 또 왜때문에 갑자기 팝업이 안열리지는 걸까, 지난주에 분명히 다 열리는 것까지 확인하고 퇴근했는데? 머릿속에 스쳐가는 강렬한 불길함에 소스를 까봤더니, 내가 작업했던 것들 다 날라가고 롤백이 되어있는게 아닌가. 어차피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느라 무슨 파일을 수정한건지 로그도 없어서 구별이 안되니까 조만간 싹다 롤백해야겠다고 현업에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백업하고 따로 요청할 계획이었단 말이죠? 아놔, 준비할 틈도 없이 당할 줄은 몰랐다ㅜㅜ 
어렵사리 맘을 다잡자마자 지뢰를 밟고 쓰러진 기분이란..

그나마 다행인건, 핵심이었던 로직이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것.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코드 수정해서 내가 생각했던 지점으로 무사히 돌아갔고, 오후에는 킴과장과 카페에서 한참동안 계약서를 쓰기 위한 회의를 했는데 각자 월 200씩 올리자는 그의 말에 뜨악했다. 너무 막나가는거 아닌가 싶어서 말리는데, 킴과장이 자기만 믿으라고 장담해서 얼떨결에 알았다고 했다.




- 두번째 화욜
현업쪽 홍책임이랑 함께 화면 테스트를 진행하다가, 팝업이 열리긴 하지만 포스트 데이터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데이터가 없는 화면으로 연결된다는 문제를 발견했다. 뭐야 이거, 데이터가 없었던게 아니라 들고가질 못했던 거였어?? 소스를 까볼수록 더욱 당혹스러웠던 이유는 까딱 잘못하다가는 3천개가 넘는 파일의 코드를 일일히 고쳐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갑자기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고, 그가 돌아가자마자 나는 또 미친듯이 온갖 파일을 열어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으면서도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볶음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헷갈려서 체할것만 같던 순간, 마침내 해결 방법을 찾아서 제대로 화면 연결하는데 성공.. 엉엉, 대견한 나새끼. 

뒷목을 잡고 겨우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자
점심시간에 헬스하러 갔다가 느즈막히 여유롭게 돌아오는 킴과장이 보였다.

뭐지, 내속의 저 깊은 곳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이 기분은..




- 두번째 수욜
조이사님이랑 영업이사님이 미팅하자고 찾아왔다. 월 200씩 올려주는건 너무 쎈거 같다고 70만원씩만 더받는 건 어떠냐며 조심스레 제안해오길래 난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킴과장이 영업쪽은 자기가 알아서 할테니 맡겨달라고 신신당부하던게 생각나서 시선을 아래로 깔고 가만히 있었고, 굳세게 버티며 방어하는 그를 옆으로 힐끔거리며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사님들이 하반기 사업도 같이 하자며 밀어붙여도 '지난주에 얘기 끝난거잖아요. 서로 두달정도 겪어보고 그때가서 다시 얘기하자고. 저희가 무조건 안하겠다는 게 아니라니까요?' 라며 반사했는데, 아놔 내가 무조건 6월까지만 일하고 나갈 결심한거 눈치 깠나? 오히려 저녁에 '지금 당장 하반기 사업까지 계약할게 아니라면 그만 엎자. 대신 연말까지 사업이 무사히 끝나면 인센을 3천씩 주겠다'라고 해와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알았다고 수락했다. 고작 열흘이었지만, 죽어라 고생해서 사업의 물꼬를 내가 다 터놨는데 이제와서 푼돈 받고 나가기엔 억울하잖아?

모처럼 김대리랑 만날 계획에 업무들을 후다닥 처리하고 맘대로 일찍 퇴근한담에, 택시타고 지난번 회사 쪽으로 건너갔다. 아니근데, 혹시 나한테 사찰달아놨나? 갑자기 김대리쪽 회사에서 외주로 알바 뛸 생각 없냐며 연락이 오더라?? 2월초에 일주일만 용병으로 와줄 수 없냐는 말에 잠깐 솔깃했지만, 지금 플젝만으로도 골치가 아파서 정중히 거절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나지금 투잡하면 죽을지도 몰라요..

내가 퇴사한지 1주만에 곧바로 퇴사를 결심한 김대리는 그동안 최팀장과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으며, 쪼잔하기 그지없는 그의 언행과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을 갔을 법한 잘난척에 치를 떨었는데, '그동안 브레이크 걸어주던 퐁과장님이 나가시니까 모든 멍청이들이 완전 폭주하더라구요' 라는 말에는 할말을 잃었다. 이제는 다른 팀의 과장들도 와서 일방적으로 일을 던지고 시켜버릴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거니;;

뒤늦게 합류한 정대리까지 '저도 퇴사합니다!'라며ㅋㅋ
정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풀수다떨고, 집에 오자마자 기절했다.




- 두번째 목욜
현업쪽 홍책임이 아침부터 찾아왔다. 업무 관련 얘기를 나누고 오늘도 화면 테스트를 함께 하다가, 갑자기 커피 한잔 하실래요?라고 묻길래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구나 싶어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떨고 쫒아나갔다. 아이스커피를 손에 쥐고 카페 의자에 앉노라니 '혹시 계약기간은 언제까지로 하셨나요? 아무래도 하반기 사업을 저희쪽으로 돌리고 드랍할 것 같아서요'라며 속삭이는 게 아닌가. 본부장이 바뀌면서 아무래도 연말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외주를 거두기로 했다지만, 우리쪽 회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내린 결정이라는 걸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봐도 이새끼들을 믿고 맡길 수가 있어야말이지?? 갑자기 이런 얘기를 일방적으로 들으면 혹시라도 내가 다 때려치고 나가버릴까봐, 조심스레 먼저 알고 계시는 게 좋을 듯하다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뒤 재빨리 사무실로 돌아와 킴과장과 긴급회의를 거쳤다. 사실은 나도 차트랑 그리드같은 노가다는 너무너무 하기 싫었거든!

오후에 조이사님과 영업이사님이 찾아와 생수기 설치를 완료하고 (드디어 물이 생겼다!!)
'이럴줄 알았으면 킴과장님과 퐁차장님이 상반기 사업만 계약하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할때 그렇게 결정할 걸 그랬어요~'라며 허허거리는 그들에게, 나는 못내 미덥지않다는 말투로 이젠 더이상 변동사항 없는거 확실하냐고 물었더니 다신 말바꾸는 일 없을거란다. 아니 내가 여기와서 하루에도 몇번씩 말바꾸는 당신들 때문에 얼마나 빡치고 고생했는데 갑자기 태어날때부터 진실된 삶을 살아온 척 하시나요..

어쨌거나, 드디어 협의는 끝이 보이고 계약서에 싸인할 일만 남았나보다.




- 두번째 금욜
계약서 초안을 받아보는 순간, 돌아버릴 뻔 했다. 월 200씩 올려달라고 뻗대는 킴과장의 제안을, 회사는 플젝 성공후 인센티브로 1500씩 한번에 주겠다더니 그대신 업무 완수가 하루씩 지연될때마다 월급의 5%를 벌금으로 상납해야한다는 조건을 함께 단 것이다. 아놔썅.. 올해는 상스러운 말을 안하겠노라 다짐했던게 무색할만큼 욕이 튀어나올뻔 했네. 이바닥 프리생활로 몇십개를 뛰어봤지만, 벌금이 명시된 계약서는 처음 봤단 말이지ㅜㅜ 그러게 욕심도 정도껏 부려야했다. 엉엉.. 

심지어, 화면 하나씩 테스트하다가 유독 어떤 js 파일의 코드를 죄다 날려먹고 에러를 뱉어내는 이슈를 발견하고 또다시 점심시간에 모니터에서 눈도 못떼고 도시락을 먹는둥마는둥 하면서까지 분석해봤지만 그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어서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는데, 할 일 없어 보이는 윤과장과 킴과장을 보자 순간적으로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더라.

어차피 지금 당장 매달려봤자 해결방안도 안보이는거,
연휴 전날이니까 그냥 확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개발자친구에게 전화로 하소연을 잔뜩 쏟아낸담에 오후 5시도 안되어 기절하듯 잠들어버림.




세수하고 에센스 바르느라 아침에 거울을 보는데,
하아... 고작 2주만에 폭삭 늙어버린거 실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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