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나날들 - 1. 지난주 하루, 그리고 또 하루
2022.01.27 11:55
- 월욜
금융권으로 옮겨서 새로운 플젝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출근해서 장비(데탑 2대)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옆자리의 테스트컴으로 화면을 열어보다가 '망했다! 잘못왔구나!!' 라고 깨달아버린게 바로 파란만장했던 일주일의 시작이 될줄이야... 뭐지 이거, 단순히 UI쪽 스크립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였잖아?? 미쳤네, 내가 아니라 프론트 개발자를 뽑았어야지!!!
소스를 까보면 까볼수록 도저히 못하겠으니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어찌나 우울하던지...
내가 아무리 퍼블로 일해왔지만 개발코드도 꽤 봤었고 졸업한지 20년이나 지났지만 컴공 전공한덕에 웬만한 코드는 해석할 수 있을거라 자부했었는데, 막상 개발 전용 소스를 열어보니 이토록 막막하다는게 너무 창피하고 자존심 상해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 내 한계점이 명확히 보이고 이것만 넘으면 한단계 훌쩍 업그레이드 될 것 같은데 그걸 못넘을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럽고 약오르고 짜증나서 한참을 씩씩거렸다.
하지만 난 빡치면 타오르는 사람이잖아?? (이래서, 변태라는 말 진짜 많이 듣는다)
저녁을 먹고 샤워하는 내내 머리를 굴려보고, 밤늦도록 모르는거 찾아보고 아이디어 짜서 테스트를 반복하다보니까.. 어라? 어쩐지 될 것 같은데?? 낼 회사가면 적용해봐야겠다!! 라는 결론이 나서, 한시름 덜고 잘 수 있었다.
- 화욜
된다, 돼. 심지어 너무도 간단히 된다!!! 만세!!!!!
아침부터 입틀막으로 내적함성을 지르다가, 점심시간에 너구리랑 통화하면서 꺅꺅 소리를 지를만큼 신났다. 팝업이 안열려서 화면분석은 물론이고 무슨 이슈가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며 시작된 사업인데, 내가 하루만에 거의 모든 팝업이 다 열리도록 한거다. 그렇다면 드디어 분석이 가능해진거지!
근데.. 아놔....
팝업 열리니까 이젠 닫는게 문제네??O_o??
겨우 산하나 넘었더니 더 거대한 산이 나타나서 멘붕.
이것은 마치, 지름길은커녕 평탄길조차 없는 거대암벽빙산이랄까? 공통 처리가 불가능하니 관련된 모든 파일을 일일히 수정해야하는 노가다만이 답이라는 결론은 둘째치고, 노가다의 개별작업은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또 모르겠잖아여ㅠㅠ 기껏 문 활짝 열어놓고 다시 새로운 이슈 때문에 낑낑대느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 수욜
또 된다, 돼. 이번에는 간단한게 아니지만, 어쨌든 방법은 알아버렸어. 흑흑, 대견한 나새끼. 너의 역량은 어디까지니. 잠시 자아도취에 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사무실이 너무 춥고 정수기도 없을만큼 근무 환경이 비루한데다 플젝은 똥망이 분명하므로 3일동안 일한거 돈 못받아도 된다고, 그냥 나가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근데, 이런 내맘을 귀신같이 알아챘는지 소속회사 대표가 임원이랑 개발자들 이끌고 와서 일정안에 해결해준다면 원하는건 무엇이든 해주겠다네? 심지어 사람도 붙여주고 돈도 주고 휴가도 주고 법카도 주겠다고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해오길래.. 나는 또다시 킴과장과 열심히 의논하고 남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킴과장과 카페에서 한참을 시나리오 쓰면서 노닥거리다 돌아왔는데.. pm이라는 윤과장이 면담하자고 날 따로 부르더라. 이미 휴가생각에 기분이 들떴던 나는 무슨일이지라는 생각조차 못하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쫓아갔다가 날벼락을 맞았으니.. '당신 특급이라며. 개발pl이라며. 근데 왜 pl처럼 안굴어? 경력이 대체 몇년이지?'라고 추궁하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어처구니 없어서 그런 얘기 처음 듣는다고 답하자 'pl이라길래 당신 오기만을 기다렸다. 근데 지금와서 그냥 스크립터라니. 스크립터는 본사에도 있고, 우리가 필요한건 개발pl이다.'라고 해오는게 아닌가. (물론 서로 존댓말이었음. 편의상 내용요약을 반말로 적은것.)
와.. 그때부터 개빡침. 당사자는 난데, 왜 난 다 처음 듣는거지?? 이것들이 대체 자기들끼리 뭐라고 씨부려온거야?? 지들은 몇주전부터 미리 들어왔으면서 여태껏 화면분석이고 나발이고 일을 아무것도 안하고 탱자탱자 놀았던 이유가, 내가 들어오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테니 나한테 전부 미루고 마냥 기다린게 맞았어?? 그리고 뭐? 스크립터는 본사에도 있는데 왜 그돈주고 날 부른거냐고?? 머릿속이 뚝 끊어졌다. 곧바로 퇴근했는데, 어찌나 열받던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늦은 밤이었지만 킴과장에게 '나가자. 난 안한다.'라고 전화함.
- 목욜
나는 고작 3일밖에 안되어 돈을 못받아도 상관없었으나, 나보다 일주일 먼저 들어온 킴과장도 덩달아 돈을 못받으면 안되니까.. 그리고 사실 나도 좀 아까운게, 며칠동안 퇴근하면 집에가서도 공부할만큼 여기 플젝을 뜯어서 분석하고 해결방안 찾아냈잖아? 아무도 못해서 계속 빠그러졌던 사업의 물꼬를 내가 텄는데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돈을 안받기는 아까우니, 오늘은 싹 다 정리하고 인수인계해서 내일 나가자 라고 킴과장과 협의했다. 일주일도 안됐는데 인수인계 문서를 거창하게 만드는 것도 웃겨서 대강 만들다가, 오후에 카페가서 이사님께 전화함. 일단 나랑 킴과장이 지금껏 해온 일을 먼저 좌라락 읊어준담에, pm이라는 윤과장과의 트러블로 인해 '애초에 계약이 잘못됐군요. 우린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아놔? 곧바로 윤과장을 버리겠다네??O_o??
아무리 과장급이라 이상했어도 명색이 pm인데 단박에 그를 버리겠다니;; 나땜에 pm을 갈아치우겠다는 시나리오는 상상도 못했던지라 너무도 당황했고, 제발 지금당장 결정하지말고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는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생각좀 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대충 짐싸서 집으로 가져오긴 했는데 어떡하지, 내가 너무 엄청난 이슈를 해결해버려서 얘네가 죽어도 못놓친다고 매달릴 거 같은데ㅜㅜ
- 금욜
아침에 윤과장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자기 때문이냐고 묻길래, 온전히 당신 때문만은 아니지만 트리거가 된건 맞다라고 답했다. 서로 단단히 오해했었고, 자기는 그저 팩트를 확인하려던 것 뿐이지 절대로 악의는 없었다고 하던데, 처음엔 제게 확인하려던게 맞으시겠지만 나중엔 따지셨잖아요, 라며 조용히 대답했고, 계속 사과하면서 다신 안그럴테니 한번만 더 자기를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그에게 '우리에겐 서로 신뢰가 1도 없잖아요. 근데 어떻게 믿겠어요? 아닌건 아닌거에요'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짐을 대충 싸놓고, 킴과장이랑 카페에서 놀다가 점심 먹고 또 카페가서 놀다가 돌아왔는데, 고객사 담당직원이 찾아와서 내게 플젝 진행상황을 묻더라. 이제껏 내가 분석하고 테스트하면서 진행한걸 요약해줬더니 그가 불쑥 말했다. "먼저 들어왔던 두사람은 매일 권한 핑계 대면서 일을 단 하나도 안했습니다."라고.. 헐, 이미 고객사에서도 다알고 이를 갈고 있었네?; 이러다 내가 오늘 그만두면, 고객사와 오래된 거래처라는 여기 외주업체는 진짜 큰일나는거구나. 그래서 대표가 손해를 입더라도 무조건 플젝 성공시켜야한다고 눈에 불을 켰던거구나. 아놔, 나 이러다 잡히겠는데?? 슬슬 걱정하던 차에 이사님이 도착했다.
월욜 출근길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생사를 넘나들고 겨우 의식을 회복해서 수술까지 받았던 그는, 어제 나로부터 플젝 그만두겠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월욜에 쓰러진 것보다 더욱 큰 위기감을 느꼈다며 회사앞으로 달려나온 것이다. 죽을 고비를 막 넘긴 사람은 얼굴색이 그렇게 까매질 수 있다는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옛날에 엄마가 내 얼굴색이 까매서 갑자기 죽을까봐 너무 무서워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을때도 대수롭지않게 넘겼는데, 실제로 며칠만에 얼굴이 까맣게 변한 이사님을 보니까 나도 너무 무섭더라ㅠㅠ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납작 엎드리는 이사님께 차마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도 머리를 쥐어싸며 테이블 위로 엎드렸고, 이대로 끝내면 저 사람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다시 다니기로 마음을 돌렸다. 아놔, 담주에 노트북이랑 쿠션 또 들고와야겠네?
이게 다... 고작 지난주에 있었던.. 단 5일간의 파란만장 스토리.
그리고 이번주는 2탄이 쓰일 수 있을만큼 또 어마어마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