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연휴는 가을이 시작되면서 끝났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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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 맞고나면 팔뚝이 엄청 뻐근하고 아프다던데, 난 팔뚝이 멀쩡해서 '아싸, 부작용 통과구나!'라며 가벼운 마음으로 휴게실에 앉아있을 때였다. 창가에서 빼꼼히 열린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좋아한지 3분만에 속이 울렁울렁.. 설마?하며 기다리는데 결국 구역질이 올라와서 가슴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고, 그런 날 지켜보던 엄마가 재빨리 간호사를 데려왔다. (백신 맞으러 온 젊은(?) 사람들중에 보호자랑 같이 온건 나밖에 없더라.. 어우, 백신 부작용에 관련된 흉흉한 소문도 못들었나? 세상에, 어떻게 혼자들 왔대..) 혈압이랑 심박수는 크게 이상없지만 혹시 모르니 따라오라며 병상에 눕히길래 40분쯤 더 쉬었고, 맹렬하게 머릿속을 지배하던 토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고나서야 집으로 돌아옴. 그리고 몇시간을 내리잤다.

자고 일어나니까, 그제서야 팔뚝이 뻐근해졌고 양쪽 관자놀이 부근이 멍든 것처럼 아프더라. 두통약을 먹고 다시 눕는데, 베프의 부친상 소식을 듣고도 찾아갈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서글퍼서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코로나 때문에 조문객도 거의 받지 못하는 친구와 백신 맞고 흐물해진 나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지만 함께 있을 수가 없다니.. 망할 코로나, 역병이 도진 세상은 절망이 너무도 쉽구나.

방문너머 거실에서 들려오는 티비소리와 강아지랑 투닥거리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들고,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보니 이틀이 지났다. 심장이 꽤 두근거리지만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안심하며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티비 보며 뒹굴다가 하늘이랑 놀고, 마음을 푹 놓았던 저녁이었을 것이다. 3일만에 샤워하고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쪽 눈이 잘 안보였던 것은. 오른쪽 눈에 커다란 얼룩같은게 생겨나서 그 너머로 보이질 않았다. 순간 너무 놀래서 후다닥 일어나 어두운 방에 들어가 누워서, 작은 불빛도 못비치도록 두 눈을 손으로 살짝 덮어서 가리고 기다려봄. 당연히 일시적인 현상이겠지, 무섭지만 꾹 참고 30분 정도 지나니까 다시 괜찮아지긴 했는데, 아놔 그 순간 어찌나 식겁했는지ㅠㅠ 

그걸 끝으로 더이상의 이상 증상은 없었지만, 하아.. 담달에 2차 맞을 생각하니 벌써 아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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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지나친 건 별로지만 지나칠 수가 없다.
하루종일 흐뭇하고 행복했던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아침부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대체 왜? 이건 뭥미?? 어이없었던 날은 결국 '아.. 내 기분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섬으로 맞춰지는건가 보네'라며 제멋대로 결론내리고, 하루종일 드라마나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본건 '그녀의 이름은 난노'였는데, 내가 살다살다 태국드라마까지 찾아보게 될줄야..^^;
연휴내내 시즌 2까지 스무편 정도를 몰아봤더니 매회 나오는 '사와디카~ 난노하~'라는 인삿말과 고장난 광대 인형처럼 아무때나 아핰핰핰 웃어제끼던 난노의 께름칙한 웃음소리가 자꾸 귀에 맴돈다. 학교괴담을 모아 놓은 것마냥 굉장히 원초적인 내용에 더해지는 날것 같은 대사에는 종종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있고,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에 극단적인 연출이 촌스럽다가도 종종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에 깜짝 놀라며 보는 재미가 있더라. 특히 시즌2의 오프닝 장면이 너무도 매력적이라 스킵도 안하고 봤다.
태국 드라마는 처음이라 그런지, 난노는 갑자기 저기서 왜 춤을 추는거지? 라는 의문따위 그냥 스쳐가고, 비현실적으로 학생을 압박하는 교사진의 태도마저 그런갑다 넘어가게 되는데, 난노가 인간적으로 그려진 에피소드는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너무 쌩뚱맞아서 제일 이상하고 겉돌더라. 인터넷 검색해보면 사람들은 그게 제일 재밌고 인상적이라던데... 아니, 아무리 옴니버스식으로 여러명의 감독이 제각각 만든거라지만 저 에피는 작붕 수준 아니냐고요..ㅜㅜ 난노는 인간의 악한 마음을 살살 꼬드겨서 파멸로 이끌어야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리는 캐릭터인데말야!
 
내가 며칠동안 노트북 앞에서 드라마를 열중해서 보니까 동생이 그건 뭐냐고 자기도 볼 수 있냐고 묻길래
"내용은 기괴하고, 더럽거나 잔인한 장면 많이 나오는데 괜찮아? 계속 피나고 벌레도 꽤 나와"라고 답했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그런건 대체 왜 보냐고 언니는 이상하다며 도망갔다. 흠.. 난 이거 3시즌 나오면 꼭 챙겨볼 계획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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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하늘이를 엄마가 땅위로 내려놓은 담에, 내가 목줄을 잡고 산책하던 시간은 어딘가 허전했던 마음속이 하얗고 작은 내 털친구만으로 가득 차올라서 좋았다. 그저 앞을 향해 내달리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제법 내 걸음걸이에 맞춰주는 녀석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다음 날에는 움직이기 귀찮다고 침대를 뒹굴거리던 내게 엄마가 '하늘이랑 보름달 보러 갈래?'라고 물어올때 망설이지 않고 벌떡 일어나 또 나갔을 정도. 그런데 임마, 지나가던 사람들이 '세상에, 산책이 너무 신나나보다'라고 감탄할만큼 매번 들뛰는건 대체 얼마나 신나서 그러는거니? 너때문에 나는 수술 이후로 제일 많이 걸어서 발바닥이 얼얼하고 종아리가 딱딱해졌지만, 그래도 해맑게 웃는 네덕분에 힘들지는 않더라.

팔각정에는 보름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서, 나 모르는 사이에 코로나가 사라졌나 싶을만큼 북적거렸고, 셀프 코너의 라면과 찐만두의 자극적인 냄새에 '집에 가면 만두 구워먹어야지!'라는 결심만 스무번을 하고, 구름으로 얼룩진 밤하늘과 점점 습해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들썩이길래 비가 오려나보다 말했더니 엄마가 '왜? 뼈가 쑤셔??'라고 물어와서 빵터졌다. 그게 아니라, 바람이 비를 품고 있잖아. 라고 답하니까 엄마는 그런말 처음 들어본다더라. (비를 품은 바람을 못느낀다고??)

적당히 달밤의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스무번 넘게 결심했던대로 만두를 구워서 다같이 나눠먹는데 갑자기 창밖으로 쿠르르릉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후 비가 퍼버버벅 쏟아져 내리고는 금방 멈췄다. 그리고 새벽내내 비는 쏟아지다 그치기를 반복하더니 연휴의 마지막날에는 다시 맑아진 하늘과 거실 창문에서 커텐을 펄럭거리는 찬 바람을 느끼며 갑자기 '아, 가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봄은 얼렁뚱땅 왔다 사라지고 여름이 느릿느릿 흘러가다보면 가을은 느릿한 여름의 계절감을 툭 밀어버리듯이 갑자기 시작했던 것 같네. 이러다 또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겨울이 다가오겠지.

그럼 이제, 남은 올해는 뭐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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